2024. 8. 7. 08:22ㆍ운명과 운의 흐름
참고참은 이에야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삼영걸3,
***남석이 지은 책들 - 미래를 보는 창, 월지통변비법 1,2권, 초한시대인물평전 1,2, 3권, 골드게임 1, 골드워 2, 골드 체인3, 건곤문언전, 명리학 몸풀기 1권, 명리학 정리정돈 2권, 계사상전해석, 게사하전 해석, 나라를 망친 여인들, 명리학 몸 만들기 3권, 역사의 승자와 패자, 일본의 인물상, 골드 인 아이스1, 명리학에세이 모닝커피와 솜사탕, 책구입처 : https://www.bookk.co.kr/chun2040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참고 또 참은 자신의 인내심으로 265년 지속된 에도막부 시대를 1603년에 개창開創하고 에도 막부의 첫 쇼군이 된 인물이다. 1543년 1월에 출생해서 1616년 6월에 사망하기 까지, 73년의 이에야스의 생애에서 어린 6살 때부터 시작된 인질 생활이 13년 동안 계속되다가 성인이 된 19세가 되어서야 긴 인질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오다 노부나가와 비밀동맹을 맺은 이후부터 히데요시와 대립을 하고, 임진왜란과 히데요시 사망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 승리를 취하고 마침내 1603년 3월 정이대장군 세이이타이 쇼군에 임명되기까지, 60년 세월을 스스로 인내하고 또 인내를 다짐하며 어금니를 악물고 이겨낸 인물이다.
이에야스는 쇼군에 오른 뒤 사망할 때 까지 13년 동안 가장 평안한 말년의 시기를 가졌는데, 그 13년은 어린시절부터 인질로 생활했던 13년의 기간과 이상하게 일치하고 있어, 평탄하지 않았던 인생의 음영과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는다. 따지고 보면 이에야스 73년 일생에서 가장 순탄했던 시기는 13년이 유일했는데 이를 비율로 보면 약 18%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 개인의 인생에서 길흉의 비율을 평균치로 보는 길3 흉7 보다 흉이 더 많은 운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야스는 1534년생인 오다 노부나가 보다 11살 적고, 1537년생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6살 적은 세 사람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1543년 1월 31일 임인년壬寅年 계축월癸丑月 임진일壬辰日 사주로 출생한다. 한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축월丑月 얼어붙은 임수壬水일간에 임계축진 수국으로 동료와 비겁과의 치열한 경쟁의 삶을 의미하는 운명이다. 이에야스가 생애 첫 인질 생활을 시작하던 6살 때는 갑인 식신대운에 무신 편관 편인운으로 편인 신금이 식신 인목을 도식하는 해가 된다.
이에야스가 16세가 되던 1558년 무오년에 오다 노부나가 측과 교전하는 전쟁터에 첫 출전해서 당당히 승리하게 되는데, 무오년의 무토가 차가운 임수의 범람을 제어하고, 오화가 인목과 인오 화국으로 축월생의 조후 용신으로 따뜻한 화 기운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후 이미가와 요시모토 사망 이후 1562년 임술년에 오다 노부나가와 뗄 수 없이 길게 이어지는 기요스 동맹을 맺게 된다. 이에야스의 배신으로 이미가와 가문은 이에야스 가문의 중신들을 처형함으로 원수로 돌아서게 된다. 1582년 정사대운 임오년에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키고 스루가와 도토미 두 지역을 새로 편입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이에야스는 스루가에서 11년 동안 인질생활을 하는 도중 16세 무오년戊午年 재운이 되는 해에 스루가의 다이묘인 이미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딸과 전략 결혼을 한다. 스루가 국의 공주 신분인 쓰루히메는 이에야스한데 콧대 높고 고집이 센 무도한 여자로 인식되어, 정반대 취향인 신분이 낮은 여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독특한 여성관을 형성시켰 놓았다. 오케하자마 전투 패배 이후,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맺자 쓰루히메의 부모가 그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쓰루히메는 마음속으로 남편 이에야스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된다.
쓰루히메가 낳은 큰 아들 노부야스가 노부나가의 큰 딸 도쿠히메와 결혼을 하지만 아들 부부에 대한 쓰루히메의 간섭이 문제가 되어 드디어 노부야스에게 할복 명령이 떨어지고, 쓰루히메도 계속 스루가와 내통하고 있는 정황을 의심한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살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힘든 인질 시기에 전략적으로 결혼한 이후 기질이 강했던 젊은 아내는 인질 신분이었던 젊은 남편의 열등의식과 내면적인 분노를 전혀 헤아리지 못했던 점이 훗날 비극적 결말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숨은 이유였다. 쓰루히메가 아들인 노부야스와 며느리 도쿠히메 부부 사이에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측실을 얻도록 개입했던 일이 원인이 된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시대가 요구하는 대의大義를 놓고는 아무리 가까운 아내나 자식조차도 처형 시킬 수 있었던 차가운 심장을 지닌 몰인정한 인간이었다. 남편위에 군림하려 했던 기氣가 드센 정실 쓰루히메와 마마보이 행세를 하고 있던 큰 아들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당시 일본 최강의 노부나가와 원한을 맺을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에야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내와 큰 아들 이외에도 이에야스에는 도쿠가와 가문을 지켜야 하는 역할도 중요했기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버릴 수 있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와 비교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기민하고 빠른 판단력과 임기응변과 문무를 겸비한 전국시대 최고 천재의 한 사람이었다. 다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와 달리 긴 인질생활에서 얻어진 감정적인 표현을 최소화 시키는 무서운 자제력과 끈질긴 인내심에서는 두 사람보다 몇 곱절 단련된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장기적인 긴 안목과 전략적인 판단에서는 당시 일본 최고의 수준이었고, 경쟁 상대였던 히데요시의 경우도 한수 아래가 분명했다. 불필요한 소모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임진왜란을 극구 반대하다가, 간토지방 개간을 명분으로 참전을 않았을 만큼 몇 년 뒤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은 히데요시를 뛰어넘었다.
이에야스는 통치철학의 중심에 무武를 문文에 우선하지만 너무 치중하지 않고, 문무겸비文武兼備를 봉건제도로 구현함으로 행정체계 속에서 봉건관료로 무사계급의 문민화를 유도했다. 이에야스는 행정단위로 무사계급을 전투형 무사에서 덕과 문을 소유한 무사로 전환을 이끌었다. 이에야스는 일본을 신의 나라인 신국神國으로 기독교를 사법邪法으로 규정, 종교적으로 철저하게 다른 종교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기독교를 배척하고 신불神佛의 개념에서 자유롭고 통합적인 불교 우선의 숭불정책을 펼친다.
불교 종파를 정리하고,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을 분리 함으로 세속적 권력에서 종교를 완전히 분리시킨 다음 각 지방 주요사찰에 그 지방 사람들의 출생신고와 사망 신고를 받고 호적戶籍을 관리하는 단가제도를 시행함으로 불교가 주민들의 생활 속 깊이 간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비교에서 전투적 능력이나 지휘관의 자질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았고 오직 나이와 운運의 순서에 뒤 순번으로 밀렸을 뿐이었다. 감각적으로 빠른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그런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정면승부를 피하고 설득과 협상으로 전향 시키는데 그만큼 심혈을 쏟았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출발은 신분이 낮은 한 사람의 뛰어난 개인이기 때문에 세력의 보완이 계속 필요했고, 급조되는 인재풀에서 위험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비록 영지는 넓지 않았지만 충성스러운 오랜 가신들과 부하들을 가진 센고쿠 다이묘의 신분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났다.
히데요시가 세력을 잡은 이후 젊은 무장들과 이시다 미스나리와 같은 수학적인 계산이 빠르고 행정에 유능한 문신들을 우대하고, 직할 세력으로 키우려 했던 사실에도 이에야스가 가졌던 근본 배경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미스나리의 수학적 계산 실력은 임진왜란 직전 조선 침공에 필요한 물자계산을 단 몇일만에 끝내고 히데요시에게 보고할 만큼 능력이 대단했다 전해진다. 미스나리와 같은 행정가를 통치의 전면에 앞세우자 전국시대를 살아남은 백전노장들은 당연히 미스나리의 세세한 행정적 통제에 반발 할 수 밖에 없었다.
미스나리와 이에야스 사이에는 궁조窮鳥는 품는다는 일화를 남긴 일화가 남아있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이에야스가 보란듯이 친 히데요시 측 다이묘들과 전략혼을 통해서 세력을 키워가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이시다 미스나리가 이에야스를 제소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반발한 영주들이 한 밤중에 미스나리의 집을 습격하자 놀란 미스나리가 혼자 이에야스 집으로 달아났다. 이때 이에야스는 미스나리를 집에 들여 보호해주고, 가토 기요마사 등의 제후들과 화해를 시켜 미스나리 자신의 성으로 둘째 아들을 시켜 배웅까지 해 주었다. 이 일화가 위기에 처한 궁조窮鳥는 품어준다고 훗날에 전해진다.
이에야스는 이미 전략적인 결론으로 히데요시 가문과 일전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고, 미스나리를 살려 줌으로 히데요시측 영주들이 미스나리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삼았었다. 그렇게 되어야 적과 아군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고, 적의 세력을 정확히 판단해야 전투에 승기를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 이에야스의 계획대로 미스나리를 중심으로 히데요시를 추종하던 모리 데루모토를 필두로 전국의 친 히데요시 계열의 다이묘들이 집결하게 됨으로, 이에야스의 동군東軍과 히데요시의 서군西軍으로 세력이 완전히 양분된다. 이에야스 측 8만명의 동군東軍과 히데요시 측 10만명의 서군西軍으로 세력이 노출된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에서 18만명의 양측 군사가 포진하고, 일본의 미래를 담보로 격돌한다.
서군에 가담했던 와키자카 야스히루를 비롯한 영주들이 이에야스 측으로 세키가하라 전장에서 돌아서기 시작하자 히데요시측 군세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단 하루만에 양측의 교전이 끝나고, 동군의 승리로 전투가 막을 내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승리한 이에야스는 주동자로 미스나리를 할복 시킨 다음3년간에 걸쳐 천천히 히데요시 가문을 철저히 멸문 시킨다.
마침내 이에야스가 1603년 3월 24일 기미己未 정관대운 마지막 해에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세이이타이 쇼군에 취임함으로 265년 역사의 에도막부 시대를 시작한다. 73세가 되는 1616년 6월 1일 신유 정인대운 병진년에 사주에 금수 기운이 넘치는 가운데 죽음을 맞는다. 이에야스는, 기뻐하다 잠에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 새벽하늘 같네, 먼저 떠나든 뒤에 남든 결국 같은 것, 함께 갈 수 없는 것을 이별이라 생각하네, 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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