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9. 06:42ㆍ카테고리 없음
일본역사 기행, 천황을 꿈꾼 노부나가,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삼영걸 1,
노부나가는 양력으로 추론하면 1534년 6월 23일 출생으로 갑오년甲午年 경오월庚午月 무진일戊辰日의 사주를 지녀서 일간이 양인 오화 인성을 월지와 년지에 놓아서 무척 신강한 사주를 타고났다. 무토에 오화가 양인으로 양인격에 월간 식신 경금이 강력한 무토의 기운을 설기할 용신이 된다.
노부나가는 18세 임신운 신해년에 상관 신금과 해수 편재가 해오합으로 아버지 노부히데가 갑자기 사망을 하고 가문을 상속받게 된다. 15세가 되던 무신년에 노부나가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던 장인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결혼을 한다. 노부나가는 장인 사이토 도산의 보호 아래 신무기였던 조총 5백정을 구입해서 전투력과 전력을 증강시키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노부나가가 27세가 되던 1560년 5월, 계유운 경신년에 금 용신의 강력한 기운을 받는 시기에 아버지 시대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이미가와 요시모토가 무력해진 무로마치 시대를 끝내고 이미가와 가문의 새로운 막부를 일으킬 생각으로 길목이었던 노부나가의 오와리를 침공하자 노부나가는 급조된 2천명의 병력으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 급습해서 죽이고 불가능한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사주의 강력한 용신운의 도움을 받아 일본 천하를 무력으로 통일 시키려는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시작함으로 명실공히 천하인天下人에 오르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노부나가는 49세가 되던 을해운 임오년에 을경합으로 용신을 묶어버리고, 해오합과 거센 오화의 발동 금 용신이 폐기됨으로 혼노지에서 변을 당하고 목숨을 잃게 된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국가 통치권력과 국가경제와 시장경제를 일치시킬 수 있는 안목을 지닌 그 시대 유일한 인물이었다. 국가 권력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시장경제와 대외무역의 중요성을 통치권력이 지켜주고, 보장해줘야 한다는 사실에 가장 먼저 눈을 뜬 유일한 다이묘 급 인물이었다. 그 결과 노부나가는 일본 전역에 시장활성화와 세금의 확대정책을 펼쳐 자유롭고 공정한 상거래 관행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성직자들의 종교 권력이 세속적인 국가권력에 집착하는 문제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종교적 권력은 종교를 믿는 신도에 그치고 선을 넘지 않도록 완전하게 통제하고, 무력으로 강제했다. 상인과 무사계급은 가능한 동원이 쉽고, 일하는 장소와 가까운 도심지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주택과 가옥을 배치했다. 전문가 집단이 모여 생활하도록 함으로 도로와 시장과 같은 생활 기반시설을 설치하기에 쉬워졌다.
전투에 전문적이고 능숙한 병사를 확보하기 위해 전문 직종으로 병졸을 양성하고 상비군으로 편성했기 때문에 전투력이 강화되었고, 병농분리兵農分離로 농민들은 군대 징집에서 자유롭게 됨으로 농경생산이 증산 되고 소득도 늘어날 수 있었다. 주민의 이동이나 교류를 불필요하게 통제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250개 번이 주요 도로와 길목마다 설치했던 4천곳 이상의 검문소를 폐지함으로 상인과 백성들의 교류와 이동과 소통을 손쉽게 함으로 상품의 유통과 교역을 자유롭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 국가 경제가 도심 시장을 중심으로 활성화 되었고,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세금을 적절하게 부과할 수 있게 됨으로 수입과 지출을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적으로 국가권력인 왕법王法에 도전하는 불교 사원과 승려들의 불법佛法을 극단적으로 혐오해서 불교를 말살하려는 폐불廢佛정책을 꾸준히 펼쳤다.
국가권력과 통치 방식에 있어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훨씬 앞서갔던 노부나가의 국가경제와 국가권력의 일치와, 백성들과 상인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거래, 종교에서 세속적인 권력의 배제는 훗날 동료이자 후배였던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통해서 그대로 이어받는 국가정책의 근본이 된다. 노부나가는 일본 열도를 짧은 시간 동안에 중세에서 근세로 이동시켜 놓았던, 전국시대에서 가장 강력하고 뛰어난 천재가 분명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일본 천황을 꿈 꾸었던 난세의 큰 영걸英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