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선택 패러다임 전환

2021. 10. 14. 07:57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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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선택 패러다임 전환

 

 

문명의 후천 개벽과 인류의 종말에 대해서, 만약 그런 사건이 단정적이고,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판단을 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런 선택이란 기존의 사고기준과 전혀 다른 새로운 변화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패러다임(PARADIGM)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 또는 이론적인 틀을 의미하는데, 미국 철학자 토머스 쿤이 20세기 초에 제안한 개념이다. 변화의 흐름이 급격한 현대에서는 흔히, 사고기준의 변화를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고 있다.

 

예컨대, 고대 중국 주周나라에서 모계사회 전통을 무너뜨리고 부계사회로의 새로운 사회변혁이나, 유럽 중세 천문학에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시대에서 이런 사건은 혁명적이고, 대부분은 단시간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였다. 즉, 객관적 관찰과 설득에 의한 양해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백성들과 연구자 집단이 갑작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과거 이론이나 제도와는 완전히 결별하는 단절적 수용 과정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혁명과 주목할 만한 획기적인 기술 발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문명의 거대한 변곡점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져온 부수적인 변화였음에도 그 영향력은 항상 기대 이상이었다. 춘추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 출현과 중세 르네상스의 출현이 바로 그런 변곡점에서 발생된 부수적 작용이었다.

 

개념(槪念, CONCEPT)은 우리 주위의 대상에서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꺼내 개괄한 관념이다. 하지만, 개념은 언어적 표현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전달과 올바른 의미 해석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을 붙잡고 개념화하는 순간 이미 당초 의도했던 의미의 영향력과 타당성이 바뀌고 줄어든다. 일반적으로 진보란 보수의 축적에 의한 발전으로 인식되지만, 혁명의 시기 동안 발견된 이상 현상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압박하고 강요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항상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이전 패러다임의 문제 해결을 넘어서는 게임의 법칙과 ‘지도’를 변경한다.

 

영성이 뛰어난 톨레(ECHART TOLLE)라는 인물은 인생의 매 순간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THIS IS IT’이라는 반응으로 이해와 수용(受容)을 정의한다. 즉, 특정 순간에 대한 집착이나 저항을 내려놓음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용은 허용하는 것; 원하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 등의 경험과 싸우지 않고 그것들이 그저 왔다가 사라질 수 있도록 인정하고 허용하는 것이라 본다. 이런 마음의 작용은 불교에서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욕망과 집착을 내려 놓는다는 방하放下와 닮았다. 한 소식 들으신 큰 스님들의 내려놓기는, 방관이나 방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 그 문제를 안고 함께 넘어선다는 의미다.

 

또, 서양 기독교에서 하느님은 본질(Essence)은 하나이지만 성부(聖父) / 성자(聖子) /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의 각각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교리 트리니티(Trinity) 혹은 삼위일체(三位一體)와도 결을 함께한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해석하면, 결국 다양한 멀티버스란 궁극적으로는 각각을 구분하거나 구별하지 않는 ‘하나(The One)’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눈 앞에 나타나는 다양성이란 결국 근본 되는 하나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위격(位格, HYPOSTASIS)은 제 각각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로서, 신성이 나타나는 세개의 모습이다. 불교에도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유사한 삼신(三身, TRIKAYA)이라는 개념이 있다. 붓다에 있어 모든 존재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3가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교의가 그것이다. 불교에 앞선 인도 브라흐만은 힌두교에서 우주의 근본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아트만이 진정한 자아를 뜻하는 개별적인 원리라면, 브라흐만은 전체적 우주적 원리다. 기원전600년경, 고대 인도에서 브라흐만과 아트만 이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 BRAHMAN/ATMAN,)의 사상이 신비적/밀교적 문헌인 우파니샤드에 의해 집성되었다. 불교의 교리도 이 사상에서 본류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 보면 동일한 삼위일체를 발견할 수 있다. 순환체로 영은 나름의 소명을 지니고 현재의 생명을 이룬 영체靈體이고, 이성과 감성은 육체에서 작용되는 외부적 사고작용을 이루어서 혼체魂體를 이루고, 육체에 제한적으로 작용되는 순수한 생리작용을 관장하는 자율신경 작용으로 백체魄體를 이룸으로 삼위三位를 구성하고 있다. 이 삼위가 하나로 이루어 짐으로 현재의 당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바로 당신이다.

 

전체가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그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사물에 있어 모이고 흩어지는 제약과 경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의 인식에서는 부분과 전체를 개별 화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부분을 각각의 개체로 인식하고 전체를 통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셋이 모여서 하나가 되고 다시 셋으로 나눠지는 원리는 생명을 이루는 근본이다. 차별과 구별없이 모이고 흩어지고 반복하는 것이다 신성을 이루듯이 인성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아일여와 삼위일체는 그 구분을 나누기 불가능하다. 개체를 구분하고,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함으로 여럿이 모여 하나를 완성하고 그 완성으로 생명을 이룬 다음에 다시 각각의 개체로 흩어지는 것이다. 생멸의 순환은 삼위일체로 이루어지고, 세 개의 모습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생명을 이루는 공식이다.

https://youtu.be/16nL8xCeD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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